보부상 정신으로 경제성장 기대

김정재 기자
기사승인 : 2020-05-28 14:25

 

보부상의 패랭이

보부상은 조선을 건국 할 당시 이성계를 도와 막대한 자금을 보태거나 정보원으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건국이후 조선 정부는 대가로 보부상들에게 독점 판매 등 여러 이권을 주었는데, 보부상은 관허상인이다. 유통업 등록을 하는 것처럼 보부상들은 공식적으로 국가에 등록을 하고, 채장이라고 하는 신분증을 받고 활동했다. 정확히는 등짐장수인 부상(負商)과 봇짐장수인 보상(褓商)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 보부상이고 그 외에도 '장돌뱅이', '장돌림', '장꾼'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당연히 국가에 세금을 내었고, 국가에서 노역도 시켰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 전투의 경우 조선 정부는 보급을 보부상들을 동원했고, 직접 전투에 참여도 했다. 

그런 만큼 혜택도 있어서, 채장이 없으면 장시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객주를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객주는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라, 상품의 위탁 및 매개와 창고업무도 했기 때문에 객주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상당한 손해였다. 조정도 반역 같은 중죄가 아닌 한 눈감아주는 일도 많았고 이런 특권에 기대 보부상들은 때론 독점 판매에 거슬리는 비보부상 장사꾼을 상대로 테러를 가하거나 방화와 살인도 자행했다.

 온갖 병란이나 왜란에서도 보부상이 용역으로 조선군 병량 및 군자금을 돕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친일파로 전향하기도 했고 반대로 갈라져서 의병에 자금을 보태주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드라마 ‘상도’에서 보부상의 모습이 잘 연출됐다. 마차나 수레를 이용한 일반적인 행상인이 되지 않고 걸어 다녔던 까닭은 한반도의 지형이 산지가 많고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마차나 수레가 갈 수 있는 지역이 한정돼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규모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5일장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장시의 발달을 이끌어냈다. 조선의 주요 상단들의 경우 국내 무역보다는 중국, 일본과의 무역에서 얻는 이익에 집중했다. 또한 국제무역에서 획득한 이윤은 재투자로 이어지기보다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가기 일쑤였고, 그 결과 한양을 제외한 도시의 발달은 어렵게 됐다. 

 

보부상 임명장

 

 보부상은 오늘날 상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율을 갖춘 집단이었다. 사농공상에서 가장 말석을 차지하고 있고, 세상으로부터 천대를 받아 제대로 된 보호조차 받을 수 없었던 상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들끼리 뭉쳐야만 했고, 이를 위해 여러 엄격한 규율을 제정 할 수밖에 없었다. 소속이 다르더라도 같은 보부상이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항시 발 벗고 나서고 병에 걸린 보부상이 있으면 일면식이 없더라도 병구완을 했고 상이라도 당하면 장례를 치러줘야 했다. 만약 행수나 윗사람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사전에 약조한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을 취급하거나, 도둑이나 사기, 겁간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는 정해진 법도에 따라 사형(私刑)을 내렸는데, 그 참혹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여러 사서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보부상에서 종합상사로 발전한 대표적인 기업은 두산그룹

 

특히, 보부상들이 자체적으로 형벌을 내릴 때는 육방관아의 관속들조차 형벌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개입할 수 있었고, 이를 무시하고 형벌을 방해했다가는 관속들은 물론이고, 양반까지도 서슴지 않고 해코지를 해서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포졸이나 양반들까지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보부상은 대개 가족 없이 홀로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일찍부터 상단을 조직해 상부상조하며 상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보부상들에게 상단은 강한 단결력과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결속력 있는 경제활동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정재 기자 ceo@nbn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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