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니체가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에서 한 말이다.

신념이 거짓말보다 위험한 적이라니?

신념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고 때로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존경을 보낸다. 성자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통절한 정신에 경외심을 갖게 된다. 유 불리를 따지고 경제논리에 이끌리며 사는 우리네 삶을 생각해 보시라. 시류에 편승해서 공적 견해의 뒤에 숨고, 적당히 무임승차하려는 태만한 정신들은 또 어떤가?

그런데 니체는 묻는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경탄하고 신념을 바꾸는 사람은 멸시할까?" 니체는 단지 '저속한 이해나 개인적 불안이라는 동기' 때문에만 사람들이 신념을 바꾼다는 생각에 우려를 나타낸다. 왜 니체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경계했을까?

"신념이란 인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와 마찬가지로 그 진리에 이르기 위한 완전한 방법이 발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완전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니체는 '신념을 갖는 것'을 무서운 현상으로 본다. 인류의 역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희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산출했다. 인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그런데 이 투쟁은 '의견들의 투쟁'이 아니고 의견에 대한 믿음, 즉 '신념들의 투쟁'이라는 지적이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무고한 생명을 살상한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신념이 형성된 배경을 연구했다면, 그래서 신념을 의심해보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훨씬 평화로워졌을 것이라고.

인류는 지금도 신념을 위한 무수한 싸움을 진행 중이다. 어느 사회든 신념이 강한 구성원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위험하다. 신념은 견해나 주장이나 상상과는 다른 몸에 새겨진 어떤 믿음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강렬해서 자신을 태우고 타자를 태우고 아직 배가 고파서 굶주린 눈으로 희생의 제단에 올려 질 제물을 기다리는 배고픈 정신은 아닐까?

우리에게 신념이 있는가? 신념을 의심하자. 신념을 배신하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내가 확장되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매일매일 나를 배반하자. 나의 신념을 배반하고 나의 익숙한 정신에 환멸을 느껴보자.

인생사에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다. 절대적 진리도 없고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 니체는 신념을 '절대적인 진리'로 고수하는 것을 어리석음과 성숙하지 못한 증상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오로지 '생성'으로 보는 니체에게는 어찌보면 신념이라는 말 자체가 아이러니로 보일 것이다. 세상은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는데 신념이라니? 생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 소멸하는 운동과 시간이 전부인 세계. 거기서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가? 신념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가? 신념 때문에 배척하고 구분 짓고 경계 짓는가?

신념을 진리의 적으로 보는 니체에게 나는 오늘 묻고 싶다.

이 세계에서 신념 없이(견해 없이가 아님!)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니체는 말하리라

"네 운명을 사랑하고 재미있게 즐겁게 가볍게 살아라"

"즐겁지 않는데? 재미있지 않은데?"

"그래도 즐겁게 살아라. 기쁘게 살아라.

파도 앞에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살아라.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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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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