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학 칼럼-금적스님] 미생물이 아니면 몸도 없다
어느 목사님의 궁금증, 불이법문(不二法門)?
2018-01-25 08:03:42
편집국

[내외경제=편집국 기자] [내외경제TV 칼럼]'하나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꼭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불교를 공부하던 어느 목사님의 의문입니다. 이분은 평생 목사를 직업으로 삼고 살다가 은퇴하고 산에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경을 비롯해서 정신세계와 관련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십칠 팔 년 전쯤에 대학을 휴학하고 있던 시기에 만났던 분입니다.

이분은 진리에 관해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게 돼서, 이전에 찾지 못했던 해답을 불교에서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목사로 살던 분이 불교에서 답을 구하게 됐을까 생각해 보니,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 분이 이해한 바가 있었던 듯합니다.

하나는 진리(眞理)나 신(神)을 밖에서 구하는 것이 오류라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나와 세상이 기억의 법칙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수행 방법으로 삼은 것이 스스로가 신(神)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독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복적인 독송을 통해 스스로 신이라는 기억을 넣기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노력을 해도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다 보니 이해의 한계에 부딪히고, 그 이전 오랜 시간을 보낸 기독교의 교리에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하나의 신이고 하나의 진리이니, 하나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둘이 아니라고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표현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각큰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고, 법문을 통해 불경에서 ‘불이(不二)’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니 그때마다 혼자 불교를 공부하던 목사님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실제로 하나라면 언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인식했다면 그 하나를 마주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언급했다면 이미 둘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마주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마주해야 존재가 성립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착각해서 나와 남, 나와 세상이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렸기 때문에 억지로 노력해야 하는 힘든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철학자가 말하는 둘일 때의 어려움

얼마 전에 유튜브를 통해 어느 철학자가 공중파 방송에서 했던 강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철학자였는데 강연의 주제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해결방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회가 돈이라는 교환가치를 얻는 것만을 목표로 하므로 각박하고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각자가 각성하여 사랑하는 것을 주된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강연에서 이 철학자가 사랑이 얼마나 힘든지 표현하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항문으로 콩을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만큼 힘든 일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이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에 어긋나는 힘든 일인 만큼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남, 나와 세상이 서로 다른 둘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나의 이익이 남에게는 이익이 아니고, 남의 이익이 나에게는 이익이 아닙니다. 정해진 가치를 한쪽에서 많이 소유하면 다른 쪽에서는 적게 소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와 남이 둘이라면 이 철학자의 말대로 사랑은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고,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여기던 나와 남,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불경(佛經)에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이치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면 남을 사랑하는 일이 콩을 항문으로 먹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유로 불경에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실까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이치

나의 세상이 드러나려면 잠을 깨야 합니다. 잠을 깨면 감각 앞에 세상이 드러납니다. 시각(視覺)에는 색(色)이 , 청각에는 소리(聲)가, 후각에는 향기(香)가, 미각에는 맛(味)이, 촉각에는 감촉(觸)이, 뜻에는 의미(法)가 드러납니다. 느끼는 주체를 나라고 하고 감각의 대상을 남이라고 하니 시각이 나이고 색은 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각과 색의 관계를 보면 이 둘을 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각 없이는 색이 있을 수 없고 색 없이는 시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빛없는 동굴 속에서 적응한 동물을 관찰하면 눈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빛이 없어 색이 드러나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눈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눈과 색은 둘 같지만 실제로는 둘이 만나서 '보인다'는 현상이 일어났을 경우에만 둘 다의 존재가 인정되기 때문에 눈과 색은 둘이 아닙니다.

나머지 감각기관들과 감각의 대상들도 마찬가지 관계입니다. 그래서 감각과 감각에 드러난 대상은 둘이 아닙니다. 나를 '감각하는 주체'라 하고 남을 '감각되는 대상'이라고 할 때 나와 남은 서로 마주해야만 드러나는 것이고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지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남은 둘이 아닌 것이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스스로의 감각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감각하는 대상이 천상의 존재라면 천상에 사는 것이고 감각하는 대상이 지옥의 존재라면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대상인 남을 괴롭게 하면서 이익을 취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가면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인 미생물 역시 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미생물과 몸이 서로 둘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미생물이 아니면 몸도 없다.

처음 과학이 미생물을 발견했을 때는 미생물들 대부분을 몸에 해로운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항생제의 개발은 현대 의학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했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에게까지 많은 양의 항생제가 사용됐습니다. 이렇게 항생제를 써서 미생물을 없애면 인류는 더 건강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항생제를 장기간 사용하면 이후에 건강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데, 보통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유아기일 때 어떤 질병으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면 아이가 커가면서 변비, 장염 같은 만성 소화기 질환과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으로 고생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장내에는 몇 십조나 되는 장내 세균이 존재하는데 이 장내 세균이 장벽에 보호막을 형성하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항생제는 몸에 유익한 장내세균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없애기 때문에 장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수소폭탄으로 대지가 황폐해지는 것처럼 항생제가 장내세균을 폭격하면 장벽은 황폐해집니다.

황폐해진 장벽은 정상적인 세균총(細菌叢)이 없어져 얇아집니다. 유익한 유산균이 사라지면 대변은 쉽게 부패하여 독성물질이 만들어집니다. 보호막이 없는 장벽에는 염증이 쉽게 생기고 장벽은 느슨해집니다. 느슨해진 장벽 때문에 독성물질은 쉽게 혈액으로 들어가게 돼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입니다.

그래서 항생제는 사람이든 가축이든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고 필요한 상황이라서 항생제를 꼭 사용해야 한다면 필요한 장내세균을 보충해줘야 합니다. 최근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프로바이오틱스(유용 장내세균), EM(유용 미생물)이 장내세균을 회복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장내시경을 하면서 건강한 친척의 대변을 대장에 넣는 방법이 도입돼 90% 이상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예도 있습니다(뉴욕 몬테피오르 의료센터 2011년). 친척의 대변에 있는 장내세균을 공급해서 장의 상태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또한 방부제가 들어간 패스트푸드보다는 김치나 된장과 같이 발효시켜 만든 음식을 섭취해 장내세균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미생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대상을 남으로 착각해 적대시하면 그 결과를 스스로 받는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법칙입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금적스님
연세대 의학과 졸업

이각스님을 은사로 출가

現 연세안심프롤로의원 원장

現 사단법인 보리수 이사

現 도각사 호법부장